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실 켈리 (문단 편집) == 여담 == 지역 공중 보건 부서의 공직도 겸해 카운티 소속 검시관이기도 했던 러시바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앨러모스 메디컬 센터에서 실시하는 모든 부검 시 시신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걸 표준 절차로 만들었고 로스 앨러모스 직원들의 시신[* 연구직과 상관없는 경리나 경비 등 일반 사무직도 포함해서.]과 그냥 카운티에서 살다 자연사한 평범한 주민들의 시신[* 이들은 직업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될 일이 없으니 대조군이 된다.]을 비교해 방사능 노출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참고로 이 '로스 앨러모스 인체 조직 분석 프로그램'은 그 후 35년 동안 1520구의 시신을 대상으로 했고 위에서 언급한 특별 조사위원회의 관련자 면담 및 조사와 기밀 문서 공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여론의 시신 탈취(bodysnatch)라는 비난을 받자 1995년 이 프로그램을 21년간 이끌었다는 연구 책임자는 엄밀히 말해 이것은 '인체 실험(experiments on human)'이 아니며 당시 유족에게 우편으로 동의서[* 그러나 일각에서는 러시바우처럼 카운티 소속 검시관이라면 유족의 동의 없이도 부검이 가능했다고.]를 받는 절차가 있었고 지역 사회 분위기도 과학 발전에 관심이 많아 호의적이었다고 해명했다. 무엇보다 이 연구로 방사능이 정확히 어떻게 인체 내에서 대사 작용하는지, 내부 장기에 어느 만큼 손상을 주는지 알게 됐고 방사능 물질을 다루는 직종에서 작업자의 안전 기준을 세우는 데도 기여했다고. 이후 러시바우는 연구 대상을 사망자의 시신으로만 한정한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1964년 오크 리지 국립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1960년부터 14년 간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신 방사선 노출 실험[* 단순 항암 시술이라고 위장했기 때문에 당연히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았고 방사선이 나오는 챔버도 평범한 병원 진료 대기실처럼 보이게 특수 제작했다.]에도 다른 과학자들과 같이 참여했다. 질소 겨자가스를 이용한 인체의 반응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초기의 항암 방사선 요법에 이름을 남긴 선구자였고 이후 체르노빌 사고 때 미국 정부가 주 소련 미국 대사관으로 보낸 파견단 중 한 명일 정도로 방사능 병리학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지만 이렇게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인물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자원 입대하여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전투한 전적이 있다. [[https://ancestors.familysearch.org/en/M4BK-993/cecil-warren-kelley-1921-1959|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